당기무 작품집

모텔 리베라

자유실존프로젝트 2022. 1. 27. 22:56
모텔 리베라
 
서울특별시 마포구 노고산동 백칠십육번지
일층엔 카운터와 자율식당이 있고 객실은 없다
주인 아주머니는 등을 기대어 앉아 졸고 있고
아들은 눈 비비며 보던 만화책을 벌써 저만치 밀어 놓았다
 
201호
종친회에 볼 일이 있어 서울을 왔다가
조카네 들를 겸 신촌 어디라고 해서 왔건만
저녁 늦게 찾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할멈과
투숙하게 된 할배 테레비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창문도 열지 않고 연신 담배만 피워 댄다
누가 묻지도 않는데 할멈의 기침을 천식 탓이라 몰아붙이고는
내일 아침 한 번 더 길 찾을 생각에 매달렸다
 
203호
공사장을 물어온 십장을 따라 지방 소도시에서
세 명의 인부가 올라왔다 임금 좋고 물 좋고
서울이라 다르다며 리모콘을 여기저기 눌러 본다
노모와 자식만 데리고 홀아비로 살아가는 고달픈 이야기
자칫하면 노숙자가 될 뻔했던 이야기
간만에 오징어 다리를 안주 삼아 씹어 대는 그들은 벌써
소주를 두 병이나 비웠다
 
301호
아래 위층에서 간간이 들리는 소음이 짜증나는 듯
아니면 잡음으로 가득 찬 자신의 머리가 답답한 듯
작곡가는 연필을 집어던졌다 조용한 방을 달라고 특별히 주문했는데
어쩐지 저 세상의 소음이 자꾸 들린다
중년의 그가 이제 히트곡도 쓸 희망은 없다 남들은 자기 작업실에서
컴퓨터로 데모 씨디를 바로 만들어 내건만 그는 아직도
여관방을 고집한다 아무도 관심 없는 칠팔번 트랙을 위해
벌써 삼 일째 투숙하며 고독의 소음에 귀가 멀었다
 
402호
벌써 초저녁엔 한바탕 소란함이 지나간 자리일 것이다
몰래 카메라가 없는 것만 확인하면 돼
두 번째 손님인 남자는 생각한다 오늘 어쩌다가 집이 아닌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
아침 밝은 간선도로 변 후문을 나와 함께 출근해야 한다
샤워를 하는 여인은 분명 낯선 이가 아닌데
사랑이라는 별명으로 아니면 욕정이라는 본명으로 이름 달기가 망설여진다
단색으로 칠할 수 있는 내 모습을 보는 것도
아 샤워가 끝났다
 
403호
술 취한 친구를 둘러메고 젊은이들이 들이닥쳤다
한 놈은 벌써 야한 케이블 채널을 찾아 냈다
토사물은 건조한 찬 바람에 말라 가고
녀석들은 윗도리를 벗어 던졌다
배꼽 내밀고 포커 치는 녀석들
삼칠일이나 가는 지독한 독감에 걸려라
널브러져 자는 친구의 어깨에 이불도 덮어 주지 않았으니
 
내일이 왔다 한참 기척 없는 여관 골목
손은 더 오지 않았는데
바람이 모터처럼 사래를 치고 낙엽이 여섯 번을 굴렀다
 
 +당기무(이정환)_노마드 물고기
 
 
 + + + + + + +
여관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여행을 좋아하면서도 가난한 탓이지요, 호텔도 콘도도 아니고, 그 흔한 펜션에서 한 번도 자보지 못한 것은. 게다가 코펠과 미니 부탄 가스 버너도 챙깁니다. 취사를 하다가 주인에게 걸리면 군소리를 들을 것이 뻔한 여관방에서 몰래 해먹는 아침밥이란, 꾸밈 없고 숨김 줄 모르는 아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요.
 
"오늘은 호텔에서 잤다. 아침에는 내 생일이라 미역국을 먹었다."
 
학교에 매주 내야 하는 숙제인 일기장에 철없는 아들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도대체 이삼만 원짜리 지방 '장'급 여관이 매번 이렇게 '호텔'로 둔갑하는 이유는 뭘까요. 여관에 재우기가 미안해서 요즘은 당일 여행을 계획하고는 합니다.
 

외박을 좋아한다는 것, 바람기의 기초이자 이동 본능의 발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는 정신도 육체도 한 곳에 머물기 힘겨운 존재의 불안일까요. 나그네가 힘든 이유는, 사실은 자신이 정지해 있는 것도 모르고 세상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정지하면 왜 고통스러울까, 더 생각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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