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옷장의 저장 능력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조합 능력이다
비열하게도 내게 줄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일층에는 티셔츠 몇 장의 등판이 보이고 중학생들이나 입음직한 군청색의 멋대가리 없는 반바지가 싸구려 재질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은 채 당당히 놓여 있다 그리고 겹이 진 옷 주름 때문에 도대체 세다가 화가 날 막막한 옷들이 겹쳐 있다 본체를 감춘 소맷자락과 꼬인 이어폰 줄처럼 가닥을 잃은 옷 뭉치가 있다 그것을 품 넓은 스웨터가 감추려 애쓰고 있다 마치 자기가 옷장 속의 위대한 봉사자인 것처럼 하지만
나는 무자비하게 이 위대한 봉사자를 하야시킨다 그러면 그 밑에 죽은 척하던 긴 팔 티셔츠가 소리지르고 막 구겨진 조끼가 말을 잃었으며 웬일로 잘 개켜진 면바지가 우중충한 미소를 지은 채 이 군상을 읊어 낸다 아무 추억도 없는 파자마가 욕설을 실컷 담고 있는 군복 바지와 함께 성겨 있는 지하 일층을 벗겨 내면 지하 이층에는 나도 잘 모르는 기억들이 무게에 눌려 제멋대로 다림질되어 있을 것이다
이층에서 옷걸이가 하는 꼴이 웃긴다 공생관계를 위해 할 수 없이 옷 안에 들어간 모양이 꼭 그림책에 나오는 악어새 같다 자기 둘레에 사월, 팔월, 십이월의 기억을 한꺼번에 담아내기에는 숨이 막히는 듯 한 손으로 턱걸이를 한다 내 기억물을 천편일률 틀에 맞추는 저들이 지긋지긋한 공생관계에서 구원되기를 바란다면 오로지 버림뿐이다 기억의 틀은 인간을 반만 정리시키고 더 정리되거나 덜 정리되면 정상이 아니라고 한다
문제는 저들이 내 기억과는 상관이 없는 영역 밖의 존재라는 것이다 만약 철봉을 잡은 손이라도 놓는 날이면 반이나마 정리된 내 기억들은 이층부터 지하이층까지 무너질 것이다 병원에서 의사들은 내 옷을 보여 달라고 로르샤흐 시트를 들이댈 것이며 나는 순순히 몇 장의 티셔츠, 싸구려 반바지, 위대한 봉사자, 막 구겨진 조끼, 잘 개켜진 면바지, 추억 없는 파자마와 욕설 담은 군복 바지는 물론이요 보이지도 않게 잘 눌려 있던 속옷, 양말 한 짝, 옷걸이에 걸려 있던 양복바지에 끼워진 허리띠 같은 것을 찾아서 주섬주섬 집어 건네 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옷장은 대형 세탁기처럼 뒤범벅되어 나는 카오스로 떨어지는 우주선의 계기판을 보고 있어야만 한다
계절에 대한 감정의 공작은 결국 승리한다 기억을 더듬으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 제일번 제일원동자로서의 신은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된다 옷장 속에는 미래가 없다 저장 능력과 조합 능력과 상처를 줄 수 있는 힘이 있을 뿐이다
+당기무(이정환)_노마드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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